불복종, 그것은 시작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주말이면 거리로 나와 응원봉을 들고 탄핵 찬성을 외쳤습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탄핵 반대를 외쳤습니다. 외치는 구호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헌법의 정신에, 누군가는 맹목적인 충성심에.


지난, 12월 첫째주와 둘째주에 저는 여의도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국회에서 탄핵만 의결 되면 그 이후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변론이 모두 끝난 지 30일이 넘도록 아직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 불안감은 더욱더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으로 시작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군주, 성직자, 봉건 영주, 산업계 거물, 부모들은 복종이 미덕이고 불복종은 악덕이라고 주장해왔다.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의 행위로 시작되었으며 복종의 행위로 종말을 고하게 될지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말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으로 시작되었으며, 복종으로 끝날 수 있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끝’이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의 생각을 포기하고 권력자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일 것입니다.
두가지의 양심
양심이라는 단어는 매우 상이한 두가지 현상을 지칭하는데 쓰이곤 한다. 하나는 권위주의적 양심으로 내가 마음에 들고 싶거나 심기를 거스르기 두려운 권위자의 목소리가 내 안에 내면화 된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양심은 인본주의적 양심으로,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제재나 보상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목소리를 말한다. 내면화되어 있을지라도 권위주의적 양심은 결국 외부 권력에 대한 복종이다. 의식상으로는 나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미 나는 권력자의 원칙을 완전히 삼켜 내 안에 받아들인 상태다.
탄핵 정국에서 가장 씁쓸한 장면은 직무 정지된 대통령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명백한 헌법 위반과 국정 농단을 목격하고도, “계몽의 목적이다”, “음모다”라며 국민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그들이 따르는 건 ‘양심’이 아니라, 에리히 프롬이 말한 ‘권위주의적 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위자의 목소리를 자신 안에 내면화해 마치 자신의 판단인 듯 포장하지만, 실상은 고장 난 확성기를 반복 재생하는 셈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제도 혹은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굴종이다. 이것은 나의 자율성을 포기하고 나의 의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외부의 의지나 판단이 들어서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나 자신의 이성과 신념에 복종하는 것은 굴종의 행위가 아니라 의지를 밝히고 확인하는 행위다. 그것이 진정으로 나의 것인 한, 내 신념과 판단은 나의 일부다.
진짜 양심은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양심입니다.
‘잘못된 것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
지금 거리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응원봉을 드는 시민들은 그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이 하는 건 ‘굴종’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복종’하는 행위입니다. 그건 프롬이 말한 진정한 자율의 표출입니다.
불복종 역량을 잃은 사람들
에리히 프롬은 “조직인은 불복종 역량을 잃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정치권을 바라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내용입니다.
자당(自黨)의 이익에 따라 사리사욕을 정당화하며, 법과 상식을 비틀고도 이를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는 복종이 아니라 자기기만일 것입니다.
합리적인 권위는 이성의 이름으로 행사되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불합리한 권위는 무력이나 조작적 암시와 같은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복종을 통해 나는 내가 숭배하는 권력의 일부가 되고 따라서 나 역시 강한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다. 불복종을 할 수 있으려면 혼자가 되고 오류를 저지르고 죄를 범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 또한 우리는 직접 목격했습니다. 공영방송을 장악하려 하고, 검찰권을 사유화하며, 시민의 정당한 의심을 ‘괴담’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두려움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은 복종을 통해서 내가 숭배하는 권력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마치며 – 빛의 혁명과 탄핵
탄핵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양심을 따르고 있는가? 누군가의 권위를 따르는 마음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성과 신념에 충실한 선택인가?
에리히 프롬이 말하듯, 불복종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지금 이 거리 위의 시민들은 어쩌면 인간다움의 마지막 불씨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성화일 것입니다.
Go for it!
참고문헌
에리히 프롬, 불복종에 관하여, 마농지, 2023.